[스크랩] 엔트로피
생명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초등학교 과학시간에서 이미 ‘생물과 무생물’을 배운다. 그러나 고도로 발전된 오늘날의 과학지식으로도 생명을 시원하게 정의 내리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생사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호흡여부나 맥박유무를 관찰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맥박이 멈추었다는 신호음과 동시에, 환자의 사망시각을 기록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러나 맥박이 멈추었다는 사실만으로 엄밀하게 ‘죽음’을 논해도 될까?
죽은 사람의 것일지라도, 장기 및 세포조직은 한동안 이식을 해도 될 정도로 건강하다. 심지어 적출한 장기를 차게 보관하며 헬리콥터로 운반한 뒤 이식하기도 한다. 이는 심장박동 유무와 관계없이, 신체의 일부는 여전히 살아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명’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슈뢰딩거는 “생명은 네트로피를 먹고 사는 존재이다. 즉, 생명체는 자연계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존재이며 존재하는 네트로피를 감소시키는 존재이다.” 라고 말했다.
바로 이것이 ‘엔트로피 설’로, 생명현상을 설명하는 여러 가설 중에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논리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철학자 베르그송도 이에 동의한다. 베르그송은 “생명은 엔트로피의 비탈길을 거슬러 올라간다.”라고 말했다.
엔트로피(entropy)는 물리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무질서도’라고 할 수 있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만물은 ‘질서’의 상태에서 ‘무질서의 상태’로 이행하려는 특성이 있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엔트로피의 법칙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지런히 정리해놓은 것들은 끊임없이 다시 정리하지 않으면 무질서하게 변해버린다. 빗어놓은 머리카락은 곧 헝클어져 다시 정리해야 하고, 해변에 지어놓은 모래성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형체가 망가져서 고쳐야 한다. 해변의 모래는 바람과 파도에 의해 끊임없이 이동하고 변한다. 이 경우, 모래들이 배열되는 경우의 수는 무한대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시 모래성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다.
모든 것이 질서상태에서 무질서 상태로 변화할 때, 그 만물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 바로 생명이다. 우리의 몸은 먹을 것을 제대로 공급해주기만 하면 끊임없이 대사활동을 하며 유지된다. 해변의 모래성처럼 낡아서 스러지는 것이 아니라, 죽은 세포를 배설하고, 새 세포로 교체하는 보수작업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또한 엔트로피를 낮추는 작업은 생명체의 손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방에 무질서하게 퍼져있는 재료를 정리해서 건물을 짓고,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은 생명체인 인간의 활동이며, 같은 방식으로 육각형의 가지런한 집을 짓는 꿀벌도 생명체다. 진화론자들은 생명의 진화 과정도 ‘엔트로피 감소의 역사’였다고 말한다. 단세포의 단순한 형태에서 시작된 생명은 오늘날 복잡한 내장기관으로 이루어진 신체로 이행했고, 이는 엔트로피의 감소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현상을 ‘우주의 법칙’으로 내세웠지만, 머지않아 예외적인 현상을 발견했고, 그 유별난 현상은 곧 생명현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악전고투의 연속으로 보인다. 범 우주적인 현상에 홀로 저항하는 생명. 끊임없이 낡고, 부서지기 시작하는 신체를 붙들고 있으려는 생명의 노력. 어쩌면 그래서 석가모니가 ‘생(生)은 곧 고(苦)이니라.’라고 말했던 것일까?